* 2024년 1월 10일부터 미디액트영상미디어센터에서 시작된 김해솔의 시창작 수업(인 척하는 친구 찾기 프로젝트) <영상과 대담의 형식으로 시쓰기>에서 상영한 영상, 비평, 산문 등을 기록한 아카이빙 공간이다.
** 한 시즌(프로젝트)이 끝날 때마다 공간의 구조나 내용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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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상영회를 준비하는 동안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우선 상영회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쨌든 상영회를 한다는 것은 관객이 한 사람이라도 필요한 일이고 한 사람이라도 상영회를 보러 오기 위해 자신의 시간이라는 것을 투자한다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는) 만족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시 기획하는 입장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각각의 작품 퀄리티다. 하지만 이 수업은 6주차 수업이고 상영회는 5주차에 이루어지며 상영회를 준비할 수 있었던 기간은 고작 4주, 한 달이었을 뿐이다. (이마저도 첫 주 수업이 오티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3주로 봐야 함) 이런 상황에서 작품 퀄리티를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기획자도 작가도 전부 뼈를 갈아 넣지 않는 이상 말이다,라는 것이 내가 4주 차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뼈를 갈아 넣어야 하는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아니, 이런 방식은 애초에 내 수업의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수업은 애초에 "잘" 하는 것보다는 지금 나의 "최선'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 수업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관객이 아니라 수업을 듣는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우선 내용과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형식을 다르게 할 수 있다
형식은 내용이나 기술 보다 완성도,라는 평가 기준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이 과하면 본질을 훼손하지만
본질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정의로부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형식이란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상영회에 입장한 당신은 지금 내가 작성하고 있는 지침서를 내 목소리로 듣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이 듣게 되는 지침서는 이 글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당신은 보고 듣게 될 것이다. 어떤 영상들과 어떤 시들을. 그리고 당신은 어쩌면 보게 될 것이다. 대체 이게 뭐지 싶은 GV를. 상영회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수업을 듣는 분들께 물었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죠. 무엇을 얻기를 바라죠. 이제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 무엇을 얻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 당신 말고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쩌면 미신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미신까지도 믿는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신이, 당신이 원하는 것까지도 지켜줄지도 모를 일.
즐거운 관람 되시기를 바라며. 김해솔 드림.
중첩된 여름과 7년의 시간
고우석(https://www.instagram.com/wooseoksee)
여름이라는 이미지와 그것의 중첩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7년 전이 떠올랐다. 한해를 넘게 여행하면서, 무더운 나라만을 골라 다녔다. 의도 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7년이 흐른 ‘오늘’을 돌아보니, 그때의 무더위는 계속해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며 내 주위를 맴도는 듯 했다. 7년동안 나에게는 계절이 없었고, 여름만이 나의 ‘오늘’ 위에 덧 씌워진 것 같았다. 이러한 ‘오늘’은 계속해서 나의 삶에서 반복될 것이고, 이것이 30년 후도 똑같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그렇게 영상을 만들게 됐다. 영상은 7년전 만달레이의 기록에서 시작된다. 이윽고 오늘의 ‘지하철’로, 그리고 30년 후의 ‘메마름’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오늘의 ‘몸부림’과 ‘발악’으로 끝이 난다.
목격자
김다솔(https://www.instagram.com/adlosmik/)
내가 채집하고자 했던 것은 언젠가 내가 목격한 파편의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방심하고 있던 나에게 난데없이 날아들어 일순간 얼굴을 일그러지게 했다.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순간을 봉인해 이곳에 묻는다.
열여덟에 엄마 손 잡고 갔던 철학관의 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김려린
아 이 세상 제일가는 가치는 순수 순수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다 순수만큼 재미를 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순수는 절대 정돈되지 않거든 아는 게 늘어날수록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지적 허영을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 마구 더럽히고 토라지고 꺄르르 웃어젖히고 싶다 아이처럼 혹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속으면서 살고 싶다 그것들이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지라도 지독하게 냄새를 맡고 싶다 똥통에 아주 코를 박고 킁킁대고 싶다
마리아나 해구의 사건의 지평선
김민선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이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꿈을 꾼다. 경계 지어지는 것들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들 사이,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뒤엉킨다. 수조에 갇혀 있는 가오리부터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까지. 몸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수백, 수천 개의 촉수가 긴밀히 모여있는 것과 다름 없다. 단단해보이는 몸의 물성은 숨과 빛과 물이 통과하며 흔들리고야 만다. 열린계(Open System)로서의 몸은 몸 안에서 대화하고, 몸 바깥과도 기꺼이 관계 맺는다. 그렇기에 어떤 몸은 한순간에 서로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경계에 갇힌 가오리인 동시에, 경계 없는 해파리가 된다. 죽고 싶지 않은 열망과 생을 따라 흘러가는 고요함이 함께 스며든다.
탈바꿈
김민지
나는 계속 무너지고 있다. 나는 자꾸 부서지고 깨지며 작아져 간다. 그러나 그건 탈피의 과정이기도 하다. 또 다른 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달라지길 원한다.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자기 부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방향이 있는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그건 알지 못한다. 무엇인지 모른 채 나는 그저 서 있을 뿐이다. 일단 무엇이든 볼이 터지도록 우겨 넣는 중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나면 무엇이든 배출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나 설사 아무것도 배출되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대도 괜찮다. 이미 먹어봤으니까. 목이 터지도록 밀어넣고 나서 그걸 토해낸 나는 구토 이후의 나일 것이다. 입안에 찝찝하게 냄새가 남아있는. 아무리 헹궈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가 내 주위를 계속 떠다닐 것이다. 그걸로 됐다.
아 잠시만 그러고 보니 원주율도 42잖아
김한나(https://www.instagram.com/404.explorer )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나에게 어느 정도는 아름다운 면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럼 그렇게 믿고 말지 이 글을 왜 쓸 수밖에 없었냐 하면 나를 알아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바깥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해 공상의 실을 뽑아 내 몸을 감아 왔다. 그렇게 누에고치가 된다. 누에고치에게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유의미할까? 글쎄 그냥 누에고치가 죽지 않았다는 것, 살아내고자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레비나스를 읽는 서울
남영신
최근 서울 곳곳에서 레비나스의 원서를 읽으며 세계를 관찰했다. 길가에 쪼그려 낡은 휴대폰에서 나오는 음악을 귀에 대는 노인과 횡설수설하며 영등포구청의 역사를 설명해준다는 남자, 그리고 진짜, 하나의 존재인 수많은 얼굴들. 레비나스는 '타자는 그 초월성(외재성) 때문에 마치 죽음처럼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무력성 때문에 나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따라서 나는 그를 보살피고 돌봐야 하고 이런 환대를 통해 존재의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이 관계는 기존의 이민자 등 사회적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잠재적인 모든 폭력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라는 요구이기도 해서 너무 급진적이다. 소위 합리적 사고와 이성이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레비나스가 알려주는 세계와의 관계, 타자와의 관계는 언어와 지식으로 세계를 닫아버리지 말고 영영 열릴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초월하라니, 생각만해도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생각은 곧잘 멈춘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을 위해서는 많은 말과 철학보다 서로 만짐과 문지름 같은 것이 더 필요할 것 같기도. 신비와 계시, 곱씸음과 명상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르츠쿠츠로 가는 741번 버스
이수련
모르는게 좋다. 알고싶지 않다. 아는것이 늘어나는건 지겹다. 그건 죽는것과 같다. 살기위해 모르고싶다. 그래서 자주 잠에 든다. 꿈에서는 항상 익숙한 모르는 곳을 헤맨다. 깨고나면 땀에 흠뻑 젖어있는데, 열에 한번 정도는 눈물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도 지겨울 땐 사람을 찾았다. 그건 언제나 새롭고 괴로워서 살아있는 감각을 준다. 가끔 둘이서도 지겨울 땐 떠나버리면 된다. 발은 붙이고. 이걸 다 설명하자니 너무 길어 시를 쓴다. 너는 알아줄거지 이 축축한 꿈을.
올리브 그린
이수연(https://www.instagram.com//sean2zero )
어떠한 상태와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게 있어 무기력함이 그러하다 여전히 모르겠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느 날은 처연한 내 눈동자가 안쓰럽다가도 또 어느 날은 늘어진 팔다리가 무척 맘에 들었다 때때로 밝지만 때때로 어둡다 그리고 대부분 그 어딘가의 상태에 머무른다 나는 세숫대야에 얼굴을 박아버리는 내가 어느 날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라 생각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그 지점을 넘어 편안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어떤 형식도 자신의 장르를 망각하지 못한다. 장르가 형식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반대로 형식이 장르를 재정의하고 대상화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장르 내부에 귀속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형식을 하나의 체계로 보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체계를 만드는 한 가지 방식은 자기에게서 산출된 것을 다시 자기에게 되돌리는 것이다.”[3] 형식이 장르의 기억을 작동시킬 때 그 작동 과정에서 형식은 자신의 고유함을 증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는 것은 세계를 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권능의 행사’인 동시에 세계 안에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귀속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설을 ‘나’라는 것이 장르 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겹쳐서 생각해본다면, 상이한 발화 장르를 경쟁시키는 그들의 형식 실험은 무엇보다 ‘나’의 존재함을 실험에 붙이는 작업일 테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수행한 하나의 프로그램, <영상과 대담의 형식으로 시쓰기>를 ‘나의 가설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두 발화 장르의 경계면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일종의 가설로서 가시화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장르의 경계에 서고자 한 자의 필연적 운명이자, 우연적 발명이다.” ...더보기
(2024, 블로그, 미디액트영상미디어센터 )
이 글은 미디액트에서 발표했던 「형식과 폭력: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와 한 쌍을 이룬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9편의 영상시 각각에 비평으로 답함으로써, 해당 모임의 제목인 〈영상과 대담의 형식으로 시 쓰기〉에서 남아있던 ‘대담’의 자리에 함께하고 싶었다. 나는 모임날 조금 우악스럽게 굴었다. ‘수업’이라고 말하는 진행자 앞에서 거듭 ‘모임’이라 말하고, ‘이여로가 뭐고, 김유수가 뭔데’ 마지막 날 나타나 비평을 쓰냐고 자문했다. 그것은 나의 취약함 때문이었다. 나는 2기를 함께한 9명과 면밀히 6주의 시간을 만난 것도 아니고, 이들과 알고 지내던 것도 아니며, 이들로부터 초청받은 것도 아니다(김해솔이 지하철에서 초청했다). 우리가 같은 규범이나 가치를 공유하며 자동으로 내부화(시인 지망생과 시인 선생님의 만남처럼)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약 1시간의 발표와, 여기 한편한편에 남긴 비평의 지면 뿐이었다. 이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이 말은 어떻게 읽힐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 이 불안은 우리 자신을 제도화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상대는 누구이고,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이고, 나는 이것에 말할 자격이 있다는 유무형의 자격을 획득하고 그것을 내재화함으로써, 말하기는 유창해진다. 하지만 나는 불안의 자리를 떠날 수 없다. ...더보기
(2024, 블로그, 미디액트영상미디어센터 )